마늘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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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 예찬
  • 이현숙
  • 승인 2017.05.23 11:15
  • 호수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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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숙
본지 칼럼니스트

지난해 한반도 남부 지역을 할퀴고 지나간 `차바` 때문에 식겁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10월에 태풍이 들이닥친 것도 드문 일이거니와 최근 10년 동안 가장 센 녀석이었다. 초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집중적으로 퍼부은 것은 당일 오전이다. 세찬 빗발에 유리 창문이 박살날 듯했다. 다행히 창문턱으로 빗물이 넘쳐든 것 외에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비가 멎기를 기다려 한달음에 밭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 벌어졌다. 전날까지도 꼿꼿하던 들깨가 바닥 가까이 단체로 드러누운 것이다. 마늘밭은 더 형편없었다. 포장으로부터 아예 훌러덩 벗겨져 나간 멀칭 비닐이 밭 한쪽 끄트머리에나 겨우 들러붙은 채, 신장개업하는 가게 앞에 세워 둔 바람풍선 인형마냥 신나게 춤을 춰 대었다. 여리여리한 마늘 새순들도 흙 표면으로부터 반 뼘 정도 높이에서 죄다 반으로 접혀 있었다. 실한 종자를 고르고 골라 온 정성을 다해 파종했기에 허탈감이 밀려 왔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버스는 떠났다.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팔을 거둬 붙였다. 우선 벗겨져 나간 비닐부터 원위치로 되돌려야 했다. 아무래도 처음 같지는 않지만 퍼즐 조각을 맞추듯 어찌어찌 제자리에 덮어씌우기를 끝냈다. 그러고 나서 멀칭 비닐 위를 무릎걸음으로 살금살금 기어 다니며 비닐 구멍 밖으로 새싹을 하나하나 끄집어 올렸다.

꺾이고 찢긴 녀석들의 상처에 집중하면서 가능한 세심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잡아 뽑고서는 흙을 북돋워 줬다.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니 온몸이 욱신거렸다. 물론 주인도 없는 밭에서 돌풍과 폭우와 맞섰을 녀석들의 고통에는 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얼추 일을 끝낸 뒤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푸른 물감이라도 잔뜩 머금은 듯 시리도록 투명한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회색빛 먹장구름이 저리도 말간 하늘을 품고 있었다니 경이로울 뿐이다. 그날 이후로 들깨는 쓰러진 상태에서 수확을 마쳤다. 마늘은 역시나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면서 질긴 목숨을 이어갔다.

마늘의 한자어는 산(蒜)이다. 독한 냄새가 유일한 흠일 뿐 이로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일해백리(一害百利)라 일컬어진다. 마늘 특유의 맛과 냄새는 알리신 성분의 영향이다. 마늘은 단순히 음식의 맛을 돋우는 양념으로써만 아니라 그 자체로 훌륭한 천연 강장제다. 마늘에 함유된 게르마늄과 셀레늄 성분이 인체에 효과적으로 작용한다고도 알려져 있다. 이미 세계 10대 슈퍼 푸드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마늘은 기원 전 2500년 경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피라미드 축조에 참여한 일꾼들에게 마늘을 지급했다. 마늘은 우리의 단군신화에도 등장해, 쑥과 마늘을 먹은 곰이 사람의 몸을 받고 웅녀로 변신한다. 서양의 흡혈귀인 드라큘라 백작을 떨게 만든 것도 마늘이다.

서양 속담을 인용하자면 `3월에 양파, 5월에 마늘`을 챙겨 먹으면 일 년 내내 의사들이 한가롭다고 한다. 유독 불가에서만은 자극성이 강한 마늘을 오신채에 포함시켜 섭취를 금하고 있다. 이렇듯 약성이 강한 마늘이기에 그 모진 태풍을 맞고도 꿋꿋한 것이리라. 추운 겨울 노지에서도 푸릇함을 잃지 않는 것이리라.

작년 가을 마늘 파종기로부터 어언 8개월여의 대장정을 마치고 이렇듯 수확기에 이르니 감개가 무량하다. 소일거리 삼아 마늘을 키우는 데다 전량 자가소비를 하는 우리는 작황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심간이 편하다.

그저 땅이 허락하는 만큼이면 족하다. 게다가 우리네 삶의 축소판이라 해도 좋을 마늘의 일생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인생 공부가 된다. 고통도 세월 가면 달달해지려니 싶은 것이.

이 고장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마늘의 강인함을 닮았다. 아니면 마늘이 이곳 사람들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나약해지기 쉬운 현대인들로서는 마늘의 생존력을 본받음직하다.

영국 시인 G.바이런은 이렇게 읊조렸다. `폭풍이 지나간 들에도 꽃이 핀다.`라고. 나는 이렇게 읊어 보련다. `폭풍이 지나간 들에도 마늘은 영근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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