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운육기의학보감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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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운육기의학보감과 어머니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04.18 19:23
  • 호수 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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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남해치과 원장

최근 우리 가족사에서 까마득히 잊혀져 가던 외조부님에 대해 돌이켜 생각하게 하는 일이 생겼다. 나는 작년말 뜻밖의 전화를 받았는데, 바로 최근에 `오운육기의학보감의 저자 조원희에 관한연구`란 논문을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에 실은 대전대한의대 윤창열 교수로부터 온 전화였다. 전화의 내용인 즉, 본인이 20년 전부터 오운육기의학보감의 저자 조원희에 대한 논문을 쓰고자 하는데 이 책이 어떻게 남해군 소재 지방 인쇄소인 남해인쇄소에서 발간 되었는지 또 이 내용을 알려줄 후손은 없는지를 알고싶다는 것이었다.

10여년을 후손을 찾아 헤매던 윤창열 교수는 얼마 전 진주에 거주하는 외조부님의 친손자인 조용호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남해에 이종사촌 형인 나를 소개해서 내게 연락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윤창열 교수는 남해에서 이책이 쓰여진 경위를 알아야 논문을 완성한다고 하면서, 외할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알려달라고 내게 협조를 요청했다.

그때부터 나는 며칠간 어릴적 외가와 어머님과 아버님이 해주셨던 말씀들을 기억하고 떠올려 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의 선친인 상종은 남해군 향교 장의를 맡고 있던 저의 조부 춘환이 성내에 갈 때마다 따라다니다가, 남해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중고등과정 검정고시를 통과하였다. 그렇게 학업에 뜻을 품고 있던 때에, 마침 조부 춘환과 잘알고 지냈던 외조부 조원희가 1935년 남해군에 남선약업주식회사를 창업하였고, 상종은 이 약업사에 다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외조부 조원희가 저술한 오운육기의학보감의 원본을 당시 조선총독부 관청의 출판허가를 받아서 발간하였다. 

그 외에도 외조부 조원희가 성균과 진사 마지막 합격자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서 같이 겸상을 하였단 말, 일본 메이지천황의 아들 대정이 난치병에 걸려서 1907년 고종에게 의사를 천거해 달라는 부탁을 받자 외조부님을 추천해주어 대정을 완치시켜주었다는 말과 1920년 중반부터 만주봉천에 살면서 추웠단 이야기와 상해임시정부 요원들에게 수시로 탕약을 지어 보냈다는 말들.

그리고 나라를 잃은 마음에 그렇게도 일본황실에서 불러도 가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진주 일대에서 환자치료를 위해 수레에 약을 싣고 돌아다니면서 치료를 해주었다는 말들, 전염병 호열자가 돌아다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죽어나갈때 약제를 챙겨서 격리된 마을에 들어가 치료해 주었다는 말들….

어릴적에는 무슨 뜻인줄도 모르고 스쳐들었던 이야기들이 하나 둘씩 기억났다.

그렇게 지내시던 외조부님은 나의 어머니가 17세 가량이 되는 1939년, 전 가족을 데리고 갑자기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 황실에서 아무리 오라고 해도 가지 않았던 외조부님이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는 나의 어머니이신 장녀에게 오사카 약전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뒤이어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던 나의 선친 상종도 일본으로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오사카 치전을 수료하여 한국으로 건너와 국가고시 1회에 합격하여 치과의사가 되었다. 장녀의 약전교육을 마친 후 나의 외조부님은 다시 한국으로 건너와 진주에 한의원을 열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글로 쓰자면 한정된 지면에는 다 실을 수 없을 만큼 선친께 들은 외조부님에 대한 일화들은 많다. 외조부님이 고종의 명령을 받고 일본 메이지천황 아들 대정을 치료해 주었고, 그 연유로 일본 황실에서 신궁철학의학박사의 칭호를 받았다는 것은 새로운 한의치료법인 오운육기 치료법이 그 당시 일본 황실에서 크게 인정 받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를 두고 남해시대신문 숨비소리의 칼럼에서는 오운육기의학보감과 관련한 외조부님의 행적을 을사오적까지 연관시켜 반일감정을 자극하면서 그것이 자랑하여 찬양할 만한 일은 아니라는 내용의 글을 게재했다. 

의료인은 적이든 아군이든 생명의 소중함을 모든 가치의 우선으로 둔다. 의료인이 의술을 배우고 의료인이 될 때 하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도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게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라는 내용이 있다. 즉 의료인은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 의료인으로 종사하고 있는 나 또한 늘 가슴에 새기고 있는 바이다. 남해시대 신문에 게재된 칼럼의 취지가 뒷날 식민통치의 주범인 일본황태자를 치료해 주었다는 사실 하나로 의료인으로서 한시대를 살아왔던 분의 인격에 친일이라는 조그만한 흠을 남기려는 의도는 아니길 바란다.

그 시대에 성균관 진사 마지막 유생출신으로 고종의 어의를 지내던 도중 나라를 잃은 그분의 삶을 하나의 사건만으로 단편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 나의 조부님은 자신의 큰 사위의 고향인 남해를 좋아했고, 조선 왕실에서 일한 것일 뿐 일본황실전의로 영화를 누린 적도 없었다. 한일합병 후 일본에서 그렇게 불러도 일본이 싫어서 만주로 건너가 살았던 그런 분이었다.

비록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잃은 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이 나라에서 36년 동안의 일제강점기를 살아왔지만,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각자의 생존을 지키며 조국의 안녕을 위해 모두가 최선을 다했으리라 본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았던 우리가 그분들의 삶의 행적을 엄격한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후손으로서 여지껏 외조부님의 삶을 자랑하고자 하는 뜻은 조금도 없었음을 밝힌다. 외조부님의 오운육기학이 세상에 알려지고 이후 책까지 번역을 마치게 되어 한의학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외조부님의 의술이 사장되는것을 안타까워하셨던 우리 어머니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기에 나는 그저 자식으로 감사할 뿐이다. 국경을 넘는 구호활동가인 국경없는 의사회의 활동처럼 의사는 어느 나라의 어느 신분이든 도움이 요청되면 달려가 치료하는 게 의무이자 도리인 것을 한번 더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 나오는 한 문장으로 이 글을 마친다.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게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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