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유배문학관 현판이야기
상태바
남해유배문학관 현판이야기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07.22 12:15
  • 호수 6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군 기록이야기 3 - 김연희 학예사

남해시대신문이 7월부터 남해군청 이미숙 기록연구사와 관광진흥담당관실 문화재팀 여창현 학예사, 남해유배문학관 김연희 학예사의 도움을 받아 `보물섬 사람들의 기억, 박물과 기록으로 만나다` 연재를 시작했다. 연재 세 번째 마당으로 김연희 학예사의 `남해군 기록이야기 ③ - 남해유배문학관 현판이야기`를 싣는다.

 

김연희 남해유배문학관 학예사
김연희 남해유배문학관 학예사

옛 건축물이나 사찰을 보면 문 위나 벽, 처마 아래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懸板)은 글자나 그림을 새겨 넣어 해당 건물의 성격을 알려주는 널조각을 말하는데 지금으로 보면 해당 건물의 이름을 담고 있는 간판 역할을 했다. 허나 지금의 난무하는 간판과는 달리 옛 현판에는 많은 이야기와 의미가 담겨있다. 권위 있는 사람이나 명필이 쓴 현판은 그 자체로 귀한 가치를 지니며, 그 문구가 담고 있는 의미와 일화를 알면 그 건물에 대한 기억도 오래 남는다.

남해유배문학관 현판에는 남해사람들도 잘 모르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년 11월에 임용되어 사무실에서 남해유배문학관 현판글씨의 주인공을 알고 참 놀랐다. `시대의 양심`, `참된 어른`, `의인`이라는 불리는 고(故) 신영복 선생의 육필 글씨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연유는 아마도 20년간의 옥살이에 분노 대신 절제와 공부, 성찰로 달관한 인격을 선생이 온몸으로 보여 주신 데 있을 것이다. 1968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이던 선생은 통일혁명단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88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 후 감옥에서 지인들과 나눈 서한을 모아 정리한 룗감옥으로부터의 사색룘을 출간했다. 이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지금까지도 스테디셀러로 남아있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하고 2006년 퇴임 후 2015년 희귀 피부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꾸준히 강단에 서고 많은 책을 출간했다.

야간조명 공사로 한결 밝아진 유배문학관 정문 현판.
서가에 보관 중인 신영복 선생의 `남해유배문학관` 친필 액자가 곧 일반에 공개된다.

남긴 글 못지않게 선생의 글씨체는 매우 유명하다. 쇠귀체, 어깨동무체, 연대체 등으로 알려진 신영복체는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 처음으로 붓글씨를 배우고, 교도소에 서도반이 생겨 정식으로 서예를 배웠다고 한다. 온종일 글씨를 쓰던 기간만도 7~8년은 된다고 하니 얄궂게도 감옥이 아니었다면 신영복체도 보지 못할 뻔했다. 조선시대 자암 김구,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원교 이광사 등 많은 인물들이 궁극의 유배지에서 자신만의 서체를 다듬고 완성했던 것을 볼 때 아마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신영복 선생의 글씨체는 철학이 담겨있다. 시조나 별곡, 성경 등을 궁체와 고체로 쓸 때는 느끼지 못하던 것을 민요, 저항시, 민중시 등을 쓸 때는 형식과 내용이 맞지 않아 어색함을 느끼고 오래 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고민 끝에 문제의 해결책을 어머니의 글씨에서 찾았다. 선생은 생전 인터뷰에서 "어머님의 서한을 임서하면서 나는 고아하고 품위 있는 귀족적 형식이 아닌 서민들의 정서가 담긴 소박하고 어수룩한 글씨체에 주목하게 되고 그런 형식을 지향하게 된다"고 말했다. 남해로 유배 와 모친을 위로하기 위해 룗구운몽룘을 남겼다는 김만중 선생이 묘하게 오버랩 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신영복 선생의 서체와 김만중 선생의 위대한 문학작품의 근원이 모두 어머니인 셈이다.

유배문학관에서 제작한 신영복 선생의 친필 낙관.

소설가 조정래의 소설 룗한강룘 표제,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시절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슬로건 등에 그의 글씨체가 사용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제호, 비문, 현판, 서화에서 그의 글씨를 찾을 수 있다. 신영복체는 컴퓨터 폰트로 개발되어 유료로 판매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고, 2018년 한글날에는 평소 많은 사람과 글씨를 나누고 싶어 한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개인사용자에 한해 무료로 전환됐다.  
생전 신영복 선생은 글을 부탁하는 이에게 잘 써주곤 했다. 남해유배문학관이 개관할 무렵 정현태 전 군수는 현판의 글을 가지고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옛 문학작품의 한글로 집자(集字)하려니 고어체로 돼있어 맞추기가 어려웠고, 고민 끝에 현대판 유배객으로 알려진 신영복 선생께 글을 부탁했다. 담당 공무원이 글을 받아오려 했는데 선생은 한사코 사양하며 의뢰비도 받지 않고 우편으로 보냈다. 으레 한 시설이 지어지면 현판은 건축을 맡은 업체에서 디자인하여 별 의미 없이 만들어지는데, 남해유배문학관의 현판에는 여러 의미와 이야기가 들어 있어 더욱 소중해진다. 앞으로 신영복 선생이 남긴 글씨를 어떻게 더 많이 알릴지 고민이다.
10년 된 유배문학관 현판 조명이 너무 흐릿해 마음이 쓰였는데 얼마 전 야외조명공사로 한결 밝아졌다. 선생의 글씨를 이용해 목판인쇄체험 낙관, 노트, 문구 등 기념품도 제작할 예정이다. 하반기에는 로비에 서가를 설치하고 사무실에 보관 중인 친필 액자도 옮겨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공개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남해유배문학관 현판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더 유심히 봐주고 더 많이 찾아주었으면 한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