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바람부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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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바람부는 섬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08.12 17:36
  • 호수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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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욱 작가
임  종  욱 작가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2012년 제3회 김만중문학상 대상을 받고 남해로 내려와 창작과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현재 고현면 중앙동에 살면서 화전매구보존회와
  고현집들이굿놀음보존회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발표한 작품에 「소정묘 파일」,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 「남해:바다가 준 선물」, 「죽는 자는 누구인가?」 등이 있다.

본지는 이번호부터 임종욱 작가의 신작 소설 <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연재를 시작한다. 원고지 500여 매 분량의 소설은 매주 게재되어 연말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선소를 중심으로 한 남해 일대이고, 1811년을 전후한 시대에 남해로 전가사변(全家徙邊)의 형을 받아 유배를 온 한 가족의 애환을 다룬다. 남해의 다양한 고적들과 전설, 풍물패 `화전매구`와 `집들이굿놀음` 등 다양한 문화유산이 맛좋은 양념으로 버무려질 소설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순조가 즉위한 지 열한 해째 되는 신미년(1811) 음력 9월의 어느 날이었다. 며칠 동안 강진만을 뒤집어놓던 폭우와 강풍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말끔히 물러갔다. 하늘은 늦가을의 푸른 기운을 저 멀리 창선까지 흩뿌려 놓았다. 구름 한 점 없어 햇살이 시나브로 따가웠지만 바람이 제법 선선하게 불어 마음은 물감이 풀리듯 고즈넉하게 가라앉았다. 선창을 어슬렁거리는 갈매기 떼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선소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몰려갔다.
선소는 오래 전부터 어물이 풍부한 마을이었다. 이 가을에는 전어가 지천으로 잡혀 올라왔고,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대구 떼들이 몰려와 풍어(豊漁)를 기약할 판이었다. 선창에서는 어부들이 어구들을 손질하다 듬성듬성 벤 회를 씹으며 막걸리로 입가심을 하기에 바빴다. 썰물 때라 바래를 나갔는지 아낙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선소는 야트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면서 푸근한 풍치를 자아냈다. 동네 사람들은 야산을 윤산(輪山)이라 불렀다. 산모롱이를 따라 왜성(倭城)의 흔적이 실하게 남아 있어 몇 백 년 전 이곳이 왜군과의 전투로 고달팠던 곳임을 알려 주었다. 바다 편 왜성 성곽 한 단애에는 장량상동정비를 새긴 큰 돌이 우람하게 버티고 서서 포구에서 나가거나 들어오는 배들을 출영(出迎)했다.
그 집채만 한 바위 곁에는 세 칸짜리 정자집이 새로 들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올 팔월에 새로 부임한 현령의 지시로 부리나케 지어진 집이었다. 멀리 진주에서 도목수까지 불러 공정을 다그치는 광경을 보면서 선소 사람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작달막한 집이라지만 터를 닦고 주춧돌을 받치며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어 기와까지 입히려면 반년은 좋이 걸릴 역사(役事)인데, 석 달만 떡 벌어진 집채가 하늘을 가렸던 것이다. 신임 현령이 오기 전부터 터 닦기가 시작되었으니 사람들의 궁금증은 가을철 아가리 소리마냥 커져갔다.
"대체 누가 머물 집이기에 저리 부산을 떠는기고?"
"글씨 말이다. 성 내 부잣집 양반네의 유락처 아이것나? 강진만이 한 눈에 쏙 들어오니 술 맛은 절로 나것네."
한 남정네가 입맛을 다시며 벙긋 웃음을 흘렸다.

"박 포교 나리 말씀을 들어본께 새로 올 현령님의 기별이 있어 벌어진 사달이라쿠던데. 아니, 남해에 발도 디디기 전에 어째 공사판부터 벌리는 거래요? 우리 등골 빼묵을라꼬 작심을 했는가베."
한 아낙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집 짓는 데 보탤 것이니 마을 이정(里正)을 시켜 돈을 염출하고 다니는 게 사실이었다.
"에라이. 빌어먹을 놈의 꼬라지하고는. 이런 저런 명목으로 공출이 득달같은데 현령 나리 유희터 기왓장 값까지 동네에서 내야 한단 말이야. 더런 세상이네!"
마을 사람들이 흘겨보며 종주먹을 쥐었지만 별 수는 없어 다들 하릴 없이 발걸음을 돌린 터였다.
어쨌거나 버젓하게 기와집은 들어섰고, 잡목을 치고 화초를 심으니 제법 본색이 번듯했다.
지금 그 집 마루에서는 한 계집아이가 열심히 걸레질을 하던 참이었다. 어깨춤까지 내려오는 땋은머리를 한 계집아이는 이마로 흐르는 땀을 연신 닦으며 행여 티끌 하나라도 놓쳤을까 눈대중에 여념이 없었다.
"얘, 홍이(紅伊)야. 거 쉬엄쉬엄 해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뭘 그리 열심히 하누. 바람 불면 또 쌓일 먼진 것을. 쯧쯧!"
홍이라 불린 계집아이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부지, 이방 어른이 방안이며 마루를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으시라는 엄명이 있었어요. 근데 벌써 다녀오셨어요? 지난 비에 관아 축대가 무너졌다던데, 닦달이 심하지 않던가요?"
홍이의 아비인 차덕구(車德九)가 마루 끝에 털썩 주저앉으며 몸에 붙은 터럭을 털어냈다.
"글쎄다. 요즘엔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쌀가마니도 번쩍 들던 난데 이젠 돌덩이 하나 옮기기에도 힘이 부치는구나. 식은땀 훔치는 날 보더니 박 포교 나리께서 강진만 물때가 어떤지 보라면서 내보내주시더구나. 빈말일 게 여실했지만, 그래도 냉큼 달려왔지 뭐냐. 나더러 좀 쉬라는 기척인 게지."
"참 고마운 어른이시네요."
"그러게. 나보다 나이도 한참 낮은 양반이 마음씀씀이가 남달라. 니 에미는 어디 갔냐? 오다 집에 들렀는데, 보이지 않더구나."
"마을 아주머니들하고 바닷가에 나가셨어요. 저녁거리가 마땅찮다며 해초며 조개라도 따오시겠다던데요."
차덕구가 멀리 언덕을 내려다보며 해안가를 눈으로 훑었다.
"그래? 기왕 일찍 들어왔으니 나도 가서 거들까보다."
차덕구가 엉덩이를 들자 홍이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오빠는요? 아직 관아에 있나요?"
오빠란 소리에 차덕구의 이마에 굵은 선이 몇 가닥 쭉 그어졌다.
"그 놈은 무슨 베짱이 그리 좋은지! 일도 하는둥마는둥 하더니 그새 어디로 내뺐나 보더라. 조 포교 나리가 알면 또 불벼락이 내릴 텐데, 어쩌려는지 모르것다."
홍이의 얼굴에도 옅은 먹구름이 내려앉았다.
"오빤들 심사가 편하겠나요. 저러다 때가 되면 마음잡겠죠."
그러나 기실 심사가 뒤틀린 것은 차덕구였다. 울화가 치미는지 마루를 꽝 내리치면서 목청을 높였다.
"아니, 누구 땜에 우리가 이런 날고생을 하는데 얼토당토않은 심사 타령이냐. 멀쩡히 잘 살던 산골에서 의지가지없는 바닷가 벽촌까지 굴러 떨어진 게 다 그 놈의 미친 짓거리 때문이 아니더냐! 그 생각만 하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도 시원칠 않아."
서슬에 홍이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오빠인 차상두(車相斗)가 몇 걸음 앞만 내다봤어도 정든 고향을 등지고 남해 섬 자락까지 밀려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엄마는 다 사람 잘못 사귄 탓이라며 두둔하지만, 오빠는 조금만 일이 틀어져도 분기(憤氣)를 씻어내지 못했다.
산골 마을 훈장 어른이 싹수가 보인다며 데려다 글공부 맛을 보인 게 화근 같기도 했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집에만 들어오면 대명천지에 눈 뜨고도 코 베어 가는 망나니가 판을 친다고 벽을 보고 삿대질을 해댔다. 한 줌도 안 되는 벼슬아치들이 나라를 들어먹고 있다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 놈아! 니가 목숨이 몇 개라도 된다더냐? 제발 어디 가서 그런 되도 않는 소리 입에 붙이지도 말어."
엄마의 조바심도 오빠의 귀에는 아래 골을 지나가는 바람소리일 뿐이었다.
"찢어진 입으로 내가 내 말 하는데, 누가 뭐랍니까? 말 못해 죽은 귀신은 극락도 못간데요."
이런 악담이 나올 때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가셨다.
"애구, 구화지문(口禍之門)이란 말도 못 들었던 게냐? 훈장 어른은 뭘 가르치셨기에 애가 저리 막 나갈꼬!"
남해로 쫓겨 오자 한동안은 조신하게 지내는가 싶더니 기어이 제 버릇 개 주지는 못했다. 이젠 갈 데까지 갔다는 절망감과 식구들에게 못 할 짓 했다는 자격지심까지 겹쳐 오빠는 점점 더 빗나갔다. 관아 포졸들에게 퉁바리를 먹으면서도 행색은 점점 어긋났다. 이제는 양친도 팔자소관이라며 자포자기한 듯하지만, 홍이로서는 부뚜막에 올려둔 갓난아이를 보는 심정을 털어낼 수 없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오빠는 심성이 착해 막 나가도 지킬 금은 알아요."
차상두는 홍이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끌탕을 치더니 홰홰걸음으로 비탈길을 내려갔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홍이는 때 묻은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마루에 앉아 넋 놓고 바다만 바라보았다. 홍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은 저렇게 큰 바다는 고사하고 물살이 센 개천 하나 없는 곳이었다. 가파른 언덕을 깎고 흙을 보태 밭을 내어 간신히 끼니 풀칠을 하던 두메산골이었다.
집이라야 남해서 네 식구가 사는 토담 초가집과 별 다름 없는 흙집이었지만, 그래도 눈 감고 걸어도 헛길로 새지 않을 손금 같은 터전이었다. 큰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몇 발짝만 걸어 나가 소리치면 동무들이 달려 나와 손을 잡아주었다. 깔깔대면서 공기놀이며 줄넘기 놀이를 하던 그 고향. 잉걸불에 감자며 고구마를 구워먹던 정다운 마을. 그러나 이제는 다시는 못 갈 머나먼 이역 땅이 되고 말았다. 좋으나 싫으나 이곳 남해에 뼈를 묻어야 할 운명이었다.
고향 동무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라 홍이는 뜨거워진 눈시울을 슬쩍 훔쳤다.
그때 저 아래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나무가 발을 치듯 비탈길을 둘러싼 끝자락에서 바람소리처럼 들려오는 인기척이었다.
"게 누구 있느냐?"
홍이는 화들짝 놀라 몸을 잔뜩 움츠렸다. 게으름을 피우는지 관아에서 염탐하는지도 몰랐다. 홍이는 잽싸게 마루와 방안을 가자미눈을 뜨고 훑어보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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