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의 고생 잊게 해준 남편 울머 씨와 남해에서 평생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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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의 고생 잊게 해준 남편 울머 씨와 남해에서 평생 살고 싶습니다"
  • 김수연 기자
  • 승인 2019.10.14 17:23
  • 호수 66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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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콘서트 with 파독 간호사 │ 호수위의 집 서부임 씨(프라우 울머·73)
토크콘서트의 주인공 파독간호사 서부임(왼쪽) 씨와 진행을 맡은 문화관광해설사 하희숙 씨.

제9회 남해 독일마을맥주축제가 한창이던 지난 사흘간(3~5일) 독일마을 호수위의 집과 알프스 하우스에서는 조촐하지만 특별한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파독 광부·간호사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를 들어볼 흔치 않은 기회였다. 꽃다운 20대 청춘을 낯선 나라 독일의 탄광과 병원에서 보낸 사람들. 콘서트 장소에 모인 관객들은 이들이 겪은 시련과 고난, 사랑과 낭만 이야기를 함께 울고 웃으며 경청했다. 독일마을에는 현재 22명의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살고 있다. 콘서트 시작 전 어쿠스틱 밴드 나인트리의 노래 공연은 콘서트의 주인공들과 관객들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특히 10년 전부터 독일마을에 정착하기 시작한 파독 광부·간호사들의 사연을 조사하면서 그들의 희로애락을 깊이 공감해온 하희숙 문화해설사가 진행을 맡아 감동을 더했다. 콘서트 말미 파독 간호사 서부임 씨와 광부 신병윤 씨가 들려주는 색소폰 연주는 비록 서툴지만 듣는 이의 마음을 적셔주기에 충분했다. 이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파독 광부·간호사의 토크 콘서트는 두 번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주>

콘서트 말미에 서부임 씨는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색소폰 연주를 관객들에게 들려주었다.

태어난 고향은 어딘가 ^ 내 고향은 창원군 진북면이다.
영화 <국제시장>을 봤다. 거기에 파독광부·간호사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와 비슷한 모습이 있었나 ^ 영화는 일면만을 보여준다. 사실은 더 많이 고생했다. 당시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직장생활을 하다 3년의 계약기간으로 파독 간호사로 갔다. 주위 사람들도 권유하고 3년이면 된다 해서 어머니도 허락하셨다.
 그런데 3년이 너무 길어졌다. 그 전에는 군청에서 예방접종, 가족계획 교육, 결핵방지 홍보 등 비교적 수월한 일을 하다가 독일에 가니 중환자 병실의 체격이 크고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간호하고 대소변 받아내는 일 등을 하려니 너무 힘들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또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다. 한 가지 약품도 굉장히 여러 가지 표현으로 해서 어려웠다. 변기라는 말도 어찌나 표현이 다양한지 한 가지만 알아서는 소용이 없더라. 1년 뒤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해지자 사람들과 친해졌다. 
 

아내와 함께 남해 독일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
는 독일사람 헤어 울머 씨. 그의 흐뭇한 미소가 인
상적이다.

남편인 헤어 울머 씨와는 어떻게 만났나 ^ 처음에는 독일사람이 너무 생소했다. 말도 체취도 달랐다. 내가 있던 지역에서는 다문화가족 축제가 열렸다. 거기에 친구들과 늦게 가는 바람에 뒤에 서서 구경해야 했는데 독일사람들이 키가 커서 공연 장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의자 위에 올라서서 봤다. 당시 남편은 대학생이었다. 그런데 웬 동양여자가 의자에 올라서 있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고 한다. 춤추는 시간에 그가 다가와서 내게 춤 신청을 했다. 그리고 1년 뒤에 결혼했다. 손 한번 잡고 춤 한번 추고 울머 씨와 48년을 함께 살고 있다. 은퇴한 이후에는 남편이 이제는 내 고향에서 살자고 말해줘서 가족들을 독일에 두고  우리 두 사람만 왔다.
헤어울머 씨와 여행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어느 나라에 다녔나 ^ 남편이 학교 교사다. 독일은 학교가 전 세계에 있다. 정부에서 학교를 세계 여러 곳에 짓고 그 나라들에 교사를 파견한다. 페루에서 7년을 있었다. 페루는 여름방학이 3개월이다. 아이가 셋인데 데리고 마추픽추, 이과수 폭포 등 남미 구경을 많이 했다. 포르투갈의 포르투에서 8년 머물렀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여행을 했다. 그런 세월을 보내서 행복했다.
 
아름다운 보물섬 남해에 언제 올 거라 마음 먹었나 ^ 유럽과 남미 등 여행도 많이 했지만 항상 고향이 그리웠다. 애가 셋이니 독일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나. 그래도 퇴직하고 3년은 살아야지 생각하고 2001년에 가족과 함께 진주에 왔다. 친구들도 만나고 맛있는 한국 음식도 먹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남해에 독일마을이 생긴다고 얘기해주더라. 남해 오니 경치가 마음에 들었다. 마치 이 땅이 나를 가지시오 하는 것 같았다. 남해가 너무 좋다고 말했더니 나중에는 남편이 꼭 땅을 사라 했다. 캠핑버스를 팔고 땅을 샀다. 독일에서 자재를 들여와 집을 짓고 지금 여기서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 여기서 사는 게 참 행복하다. 보통사람보다 많은 경험을 하고 말도 많이 배웠지만, 이제는 여기 자그만 집에서 경치 좋고 공기 좋고 날씨 좋은 이곳에서 사는 게 좋다. 독일은 날씨가 맑은 날씨가 별로 없다. 항상 비오고 흐리고 춥다. 그래서 남편은 독일마을에서도 특히 볕이 좋은 이 집을 좋아한다. 남편과 함께 이곳에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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