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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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의 두 얼굴
  • 남해타임즈
  • 승인 2023.07.21 11:27
  • 호수 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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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세이 │ 장현재 본지 칼럼니스트·삼동초 교사
장  현  재본지 칼럼니스트삼동초 교사
장 현 재
본지 칼럼니스트
삼동초 교사

 긴 장마의 잠깐 휴식기이다. 얇은 햇볕 아래 분홍빛 실타래를 짧게 묶어 놓은 듯한 자귀나무꽃이 녹색 잎 사이에서 수런거린다. 꿉꿉해서 그럴까? 하늘 밑 푸른 바다, 은쟁반, 하얀 모시 수건, 상큼한 여름빛이 물든 이육사의 시 청포도가 그리워진다.
 칠월 여름날 아침이다. 구름 사이로 잠깐 해가 보이더니만 이내 한 보자기 풀어놓은 바람이 풍경소리와 함께 검은 구름을 피워 올린다. 그 짙은 녹색 바람 끝자락에는 비가 묻어있다. 출근을 서두르는 시각 사위가 점점 어두워진다. 곧이어 세찬 비가 쏟아진다. 우산도 무용지물이다. 국지성 소나기이다. 소나기는 오래 내리는 비는 아닌 좁은 지역에서 온도 차이로 만들어지는 적란운으로 인해 내리는 비이다. 소나기를 삶의 여정에 간이역이라고 비교하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떤 이에게는 갈증을 해소하는 단비가, 어떤 이에게는 일을 앞두고 곤란에 빠지게 하는 비가 될 수도 있다. 빗소리가 요란하다. 한소끔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이 보인다.
 소나기 하면 좋은 경험과 좋지 않은 경험이 있다. 사람을 망각의 동물이라 했는데 이 두 경험은 잊힘을 거부하며 언제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좋은 일이 펼쳐지면 여유롭고 긍정적인 기대로, 그렇지 못한 일에 휩싸일 때면 조급증과 불면에 시달리며 종이에 베인 일상이 거듭된다. 사람은 좋은 경험보다 아프고 상처 입은 경험을 깊이 기억한다. 이 기억은 소멸하였다고 생각하지만, 비슷한 환경에 처하면 되살아난다. 일종의 트라우마이다.

 소나기에 대한 두려운 경험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늦가을에 있었다. 그때는 나라도 가정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주식은 보리쌀이었고 쌀밥은 특별한 날 아니면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집마다 방앗간에서 쌀보리를 찧어 보리쌀을 준비하는 일은 큰 행사였다. 방금 찧은 보리쌀은 하루쯤 멍석에서 말린 후 큰 옹기 항아리에 넣어 보관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일정한 양의 보리쌀을 삶아서 대나무로 엮은 바구니에 넣어 바람 잘 통하는 곳에 두고 매끼 적당량을 가마솥에 두르고 가운데 쌀 반 홉 정도 앉히고 불을 지폈다. 그 해도 마찬가지였다. 몸빼 가랑이만 잡고 다니는 탓에 땔감을 준비하는 어머니를 따라 앞산에 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풀빛 바래지는 무덤가에 있어라고 하신다. 대나무 갈퀴로 솔가리를 긁는 동안 혼자 있는 게 무서워 엄마를 수업이 부르곤 하였다. 하지만 그날은 제풀에 지쳐 깜박 졸았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깨우며 업히라고 하셨다. 주위는 어두워지고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모아놓은 솔가리는 젖혀 두고 나를 들쳐업고 잰걸음으로 산길을 내려 집으로 달리기 시작하셨다. 그 연유는 어제 찧은 보리쌀을 말린다고 멍석에 펼쳐 놓았는데 비 맞으면 낭패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머니 등에서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빗속에서 그렇게 빠른 어머니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했을 때는 아미 소나기가 지난 후였다. 초가지붕 처마 아래는 빗물이 흥건하고 마당에는 옆집에서 온 사람들이 보리쌀을 옮기지도 못한 채 모아서 멍석을 덮어 놓은 정도였다. 소나기는 지났지만, 비 맞은 보리쌀은 엉겨 붙고 곰팡이가 피었다. 그리고 이듬해 초가을 어머니 따라 산밭에 갈 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 자리에서 비온다고 비설거지 않하냐며 집에 가자고 울며 앙탈에 쇠풀을 뜯다가 손바닥을 베인 기억이 있다. 아마 지난해 소나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살아난 것이었으리라.
 또 다른 소나기에 대한 경험은 중학생 된 후 읽게 된 황순원의 소나기와 영국 작가 위다의 플란다스의 개이다. 여기서 황순원의 소설은 비와 관련 있지만 위다의 소설은 삶의 소나기로 관계를 짓는다. 정보매체가 발달하지 않은 시절 소나기의 작가 이름만 보고 여성인지 생각했다. 섬세한 구성과 부드러운 문장, 자연을 묘사한 부분은 너무 좋았다. 다만 결말을 소녀의 죽음으로 맺은 작가가 미웠다. 이 소설에서 소녀를 죽게 한 원인은 소나기였다. 다음으로 찡한 아픔을 준 것은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였다.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지방의 작은 마을 플란다스를 배경으로 가난한 소년 넬로와 부잣집 딸 알로와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였다. 주인공 넬로의 꿈은 루벤스와 같은 위대한 화가가 되는 것이었지만 가난과 주변 사람의 불신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게다가 마을 최고의 부자 알로아네 집 풍차 방앗간을 불 질렀다는 의심을 받고 모진 겨울을 맞는다. 소년 넬로에게 젖어 든 어려움은 감당하기 힘든 소나기 같은 것이었다. 모두가 행복해하는 성탄절을 앞두고 넬로는 가난과 추위, 냉대 속에서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안트베르펜 대성당의 휘장에 가려진 루벤스의 그림을 보면서 파트라슈를 끌어안고 하늘로 간다. 소설 소나기의 소녀 죽음과 플란다스의 개의 넬로와 파트라슈의 죽음이란 결말을 통해 작가는 우리 삶에서 관점을 달리한 소나기의 이면을 던져주고 있다.
 소설이나 영화, 삶에서 감동은 깊이가 찐하고 아플수록 오래 간다. 반대로 피하고 싶은 트라우마는 그 조건에 맞을 때 되살아나 자신을 괴롭힌다. 소나기를 꼭 비라고만 할 일은 아니다. 삶의 환희, 잠깐의 고난일 수도 있다. 형태는 다르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란 말처럼 내리는 비이다. 우리는 삶에서 소나기는 몇 번을 만날까? 모든 사람의 삶은 자신이 주인공인 드라마이다. 소나기가 그치면 무지개도 뜰 것임을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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