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상실의 시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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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과 상실의 시간 앞에서
  • 남해타임즈
  • 승인 2023.08.17 12:57
  • 호수 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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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칼럼니스트
이  현  숙칼럼니스트
이 현 숙
칼럼니스트

 지구가 존재하는 이상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생멸을 반복할 것이다. 이는 불가항력적 자연법칙이다. 그런데 탄생은 늘 반갑고 죽음은 늘 쓸쓸하다. 최근 우리 가족과 열두 해를 함께한 반려견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마지막 배설물과 몸에 꾀인 구더기를 처리하면서 꺼림칙하다거나 더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만 마당 바닥을 뱅글뱅글 돌며 발톱으로 긁어서 생긴 선명한 동그라미를 본 순간, 한 생명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고통의 실체가 어렴풋이나마 이해되었다. 그래도 마지막 모습은 행복한 꿈이라도 꾸는 양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녀석이 살아서는 그저 `주인 바라기`였다. 시도 때도 없이 꼬리를 흔들고 침을 바르며 애정 공세를 퍼부었다. 주인이 뭐라고 물을 그렇게나 싫어하면서도 장마철에 비가 철철 내릴 때조차 제집에서 나와 꼬리를 힘차게 흔들어 대었다. 말 못하는 동물이지만 영역 구분은 확실했다. 마당에서는 집주인 행세를 할망정 별짓을 다해 유혹해도 현관문 안쪽으로는 절대 발을 들이지 않았으니까. 아무데서나 변을 보는 일도 없었다.
 `빠삐용`이란 별명처럼 호시탐탐 탈출을 시도하는 통에 하루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그날 외출하려고 대문을 열며 1,2초 방심한 사이 빼꼼 열린 문틈으로 냅다 뛰쳐나갔다. 눈앞에 닥친 운명을 외면한 채. 얼마 후 집에 돌아와 대문 앞에서 서성대는 것을 보고도 속상한 마음에 아는 체를 안 했더니 풀이 죽어 꼬리가 축 처졌다. 물을 떠다 주자 손을 쓰윽 핥고는 게눈 감추듯 물그릇을 비웠다. 사과의 제스처인 셈이다. 
 이튿날 평소와 달리 비척비척 걷기에 보니까 왼쪽 다리가 약간 부었다. 병원에 데려가야 하지만 차를 탄 적이 한 번도 없어 심한 저항이 예상되는 데다 몸집이 커서 선뜻 엄두가 나질 않았다. 네댓새 주저주저하는 동안 다리는 확연히 부어올랐다. 게다가 하루이틀 사이 눈에 띄게 털이 지저분해지고 전에 없이 파리가 달라붙는 게 왠지 수상쩍었다. 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마자 마당에 나가 잔뜩 옴츠러든 녀석의 몸을 벌린 그때 너무 놀라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 안쪽에 파리가 쉬를 슬어 참깨만 한 구더기가 오글대고 있었다. 
 식탐이 많은 녀석이 늘어질 대로 늘어져서 참치 통조림도 거부하고 두유를 줘도 본숭만숭하니 애가 탔다. 보다 못해 손 국자에 두유를 담아 입에 대주자 그제야 힘겹게 핥는다. 말하자면 내 오목한 손바닥에 코를 박고 먹은 두유가 이생의 마지막 식사다. 여하튼 이유라도 알아야겠기에 서둘러 목욕을 시키고 차에 태워 병원에 갔다. 수의사는 첫 마디에 `늦었다`며 어디서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상처 부위가 감염되면서 패혈증을 일으켜 몸속에서 썩은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고 했다. 항생제 주사를 맞히고 세균 감염증 치료제를 받아 왔다. 
 다음날 아침, 병원에 다녀온 보람도 없이 밤새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서 나도 못 알아보고 가느다란 신음소리와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다급한 마음에 수의사에게 전화를 걸자 "간밤에 안 죽었어요?" "손쓸 방법이 없어요."라고 잘라 말한다.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실낱같은 생명의 끈을 붙들고 있는 녀석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체 청소부 파리 떼만 죽음의 냄새를 맡고 점점 더 꾀어들었다. 문득 어딘가에 처박아 둔 모기장이 떠올라 찾아다 씌워 주니 더 이상 파리는 덤비지 못했다. 
 오후 들어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녀석의 곁을 내내 지키다가 집안으로 들어와 저녁을 준비하고 다시 마당으로 나갔다. 그새 대지를 덮은 어둠 사이로 녀석의 앞뒤 다리가 나란히 곧게 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죽음을 직감하고 모기장 안으로 떨리는 손을 집어넣으니 이미 숨이 멎은 뒤였다. 한순간에 뒤바뀐 삶과 죽음이 야속했다. 그날 외출을 안 했더라면, 병원에 당장 데려갔더라면, 속절없이 슬픔만 차올랐다. 그날 이후 문득문득 지난 추억들이 떠오를 때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녀석의 이름만 공연히 불러 본다. `해피`야.
 올해는 아마도 이별과 상실의 한 해가 되려나 보다. `해피`를 잃고 가슴이 먹먹한데 이곳저곳에서 부음이 끊이지 않는다. 올봄 시댁 어르신이 유명을 달리하셔서 착잡하던 중에 남편의 어릴 적 다정한 동무가 뜻밖에 세상을 하직하셨다. 그리고 요양차 외지에서 처가가 있는 이곳으로 이주한 이웃 마을 아저씨가 세상을 떠나셨다. 같은 마을에 사시던 아저씨 한 분도 황망하게 세상과 작별하셨다. 
 물리적 거리로 따지면 세상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던 어르신도 영면하셨다. 19살 어린나이에 시집 와 70년을 해로한 동갑내기 남편을 남겨 둔 채 홀로 먼 길을 떠나신 것이다.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책 그만 읽고 나랑 경로당 놀러가세." 하신 것은 생판 낯선 고장에 정착한 우리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씀임을 잘 안다. 작은 답례로 이따금 간식을 만들어 드리면 잊지 않고 음식 솜씨를 칭찬해 주셨다. 어느 해 초파일 절에 가고 싶다 하시기에 우리 차로 몇 분을 모시고 함께 예불에 참석한 추억도 있다. 
 어느 비 내리던 날의 후일담을 들려주시기도 했다. 우연히 우리 집 마당을 건너다보니 비에 등짝이 젖은 채 쪼그리고 앉아 개에게 우산을 씌워 밥을 먹이는 광경에 `개가 어찌 예삐면 저렇노` 생각하셨단다. 항상 활달한 목소리로 `아무개 어매야` 부르시던 어르신도 떠나고, 온 동네 파수꾼 노릇을 자청하고 과감하게 짖어대는 바람에 적지 않게 민폐를 끼쳤던 `해피`도 떠났다. 불과 몇 달 사이 벌어진 이 모든 일들이 꿈결인 듯하다. 
 누구나 사는 동안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은 이별과 죽음이다. 반목질시하던 대상조차도 아주 떠나고 나면 더 이상 미움과 다툼은 없겠지만 사랑하고 화해할 기회도 함께 사라지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아끼고 의지하고 사랑하던 대상이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런데 과연 뉘라서 그 길을 피할 수 있으랴. 정녕 피할 수 없다면 이별과 상실의 아픔을 딛고 먼저 떠난 이들의 몫까지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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